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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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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 위화도 회군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은 고려말기 1388년 (우왕 14) 음력 5월, 요동정벌차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른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이성계가 개경으로 회군(回軍)한 사건이다. 우왕은 서경에 머물면서 전국에서 5만 여명의 군사를 징발하고 압록강에 부교를 만들어, 최영은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로 삼아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였다. 이때, 우왕은 돌이킬수 없는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건 최영을 출정시키지 않는 것이였다. 그렇게 총사령관이 남은 채 정벌군이 떠났다 끝까지 4불가론을 고수하는 이성계에게 동원 가능한 모든 군사를 내어 준 채로 말이다. 요동출정은 본래 이성계의 본의와 소원은 아니지만 출정군은 압롱강 하류 ..
고려의 몰락의 시작 고려의 왕, 공민왕 공민왕은 세자시절을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보내게 된다 고려로 돌아와 즉위하자마자 무신정권의 세력 기반을 혁파하고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반원 자주정책을을 선언하고 친원파를 숙청하였으며 원나라의 이익을 대변하고 고려의 내정을 사사건건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며 격하시켰던 기구들 (중서문하성, 상서성 등) 의 관제를 다시 복구한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노국공주의 사후 개혁의지를 상실하였다. 신돈 등을 등용하여 권문세족과 부패 관료와 외척을 정리하고 신진사대부를 중용하는 등의 개혁정책을 폈으나 실패하였다. 영명하고 다재다능하였으며, 특히 그림과 서예에 능하였다. KOREA(코리아) 는 당시 고려를 뜻 하는 말로 현재 까지도 쓰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