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왕, 공민왕
공민왕은 세자시절을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보내게 된다 고려로 돌아와 즉위하자마자 무신정권의 세력 기반을 혁파하고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반원 자주정책을을 선언하고 친원파를 숙청하였으며 원나라의 이익을 대변하고 고려의 내정을 사사건건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며 격하시켰던 기구들 (중서문하성, 상서성 등) 의 관제를 다시 복구한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노국공주의 사후 개혁의지를 상실하였다. 신돈 등을 등용하여 권문세족과 부패 관료와 외척을 정리하고 신진사대부를 중용하는 등의 개혁정책을 폈으나 실패하였다. 영명하고 다재다능하였으며, 특히 그림과 서예에 능하였다.
<고려의 무역>
KOREA(코리아) 는 당시 고려를 뜻 하는 말로 현재 까지도 쓰이고 있으며
당시 세상에 KOREA 를 알릴 정도로 해상활동이 활발했던 국가이다.
중세 온난기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존재했던 만큼, 신라에 비교해볼 때 바다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기세가 등등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북으로는 요와 여진, 서로는 중국의 송나라, 남동으로는 일본 규슈 지방, 남으로는 타이·베트남·아라비아까지 커버하는 교역 규모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 4국시대의 가야에 비할 바는 못 됐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역사학이라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지 모르겠다. ‘일단 정치적으로 중국에 눌려 있었고, 일본 역시 각 지방별로 무신들이 실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해상활동이 경제적 교류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중앙정부 자체가 끊임없는 정변으로 실질적으로 자기 국민들의 활동을 밀어줄 수 없었다는 요인도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 공민왕의 개혁 >
1. 몽골식 두발 형태인 변발을 없애고 우리의 고유 두발모습을 찾게 했다.
2. 원나라의 의복인 호복을 과감히 벗게 하고 고려인의 본래 의복을 되살렸다.
3. 고려에 대하여 전횡을 일삼는 원나라 황족인 기식.기철.기원.기주.기륜 등의 기씨 일족을 멸문하여 원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4. 친원파를 몰아내고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했다.
5. 최유의 반란을 최영과 이성계로 하여금 잠재웠다.
6. 원나라 황족에게 강제로 빼앗긴 넓은 땅과 노비와 재산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7. 원나라가 고려를 감시하고 지배하기 위해 세운 정동행성을 폐지했다.
8. 철령 이북을 지배하기 위해 세운 원나라 사령부인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원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다.
9. 주기적으로 몽골에 공녀와 환관을 보냈던 관례를 없앴다.
10. 원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고려의 자주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11. 원과 관련된 각종 시호와 제도를 고려식으로 고쳤다.
12. 왕의 지위를 격하시키기 위해 왕명에 '충'자를 붙이던 것을 없애고 다시 왕명을 되찾았다.
13. 전민병정도감을 설치하여 억울하게 빼앗긴 땅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14. '천산대렵도'를 남겼다.
<공민왕의 사랑>
고려의 몰락의 시작점은 노국공주의 죽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공민왕이 어린시절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있던 시절 노국공주라는 원나라의 부인과 혼인을 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이는 아주 좋았으며, 노국공주는 원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반원정책등을
지지하는 등 공민왕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문제는 공민왕과 노국공주 사이에 아이 소식이 없었고,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너무 사랑하는 바보였다
노국공주는 임신을 하게 되지만 아이를 낳다가 죽게된다
이 충격으로 인해 공민왕은 남색과 술, 향락에 탐닉 등개혁의 의지를 상실하며 왕으로서의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로 인해 고려의 개혁은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고려의 몰락의 시초라고 볼수 있다
이때부터 공민왕은 젊고 아름다운 귀족 자제들로 "자제위"라는 기구를 구성하였다
여기서 부터는 우리가 잘 아는 영화 "쌍화점" 의 내용이다
자제위들을 비,빈(후궁) 들과 관계를 맺게 하고 그것을 지켜보기도 하며 자제위와 동성애를 즐기는 행위를 한다
그러던 중 익비라는 후궁이 임신을 하게 되고 그 아버지는 자제위 "홍윤" 이라는 인물이다
최만생이라는 내시가 공민왕에게 알리게 되고, 공민왕은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홍윤을 죽이면 익비 뱃속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최만생도
죽일거라는 내용을 흘리게 된다
최만생 내시는 자제위 홍륜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되고, 가만히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홍륜을 포함한 자제위는
먼저 왕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1374년 공민왕을 시해한다
1360~1361년, 공민왕 9~10년에 중국 하북성에서 머리에 붉은 두건을 쓴 도적이라는 뜻을 가진 홍건적이 일어나게 된다. 이들은 농민군으로 원나라의 지배에 반대하자 하북성에서 요동까지 점령했던 이들이 원나라의 반격을 받아 고려로 밀려나게 됩니다.
동북면 출신의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 의 죽음으로 이성계가 두각을 들어낸다
당시 홍건적(홍건군)에게 수도인 개경을 뺏기게 되는데 이때 이성계가 활약함
이 후 원나라 나하추의 침략에서도 이성계가 활약하게 되고
전쟁의 천재로 급부상하게 되며 이름을 알리게 된다
원나라에서 고려가 10년간 컨트롤 되지않자
공민왕을 폐하기로 하고 덕흥군과 최유에게 원나라 군 1만명을 내어주고 고려로 보낸다
이때 고려의 공민왕은 최영장군에게 토벌하라고 명하게 되고 이성계도 참전하게 된다
이성계는 겁먹은 타군의 장수들에게 답답함을 호소하자
타 장수들이 "그럼 혼자 싸우시오!" 란 말에 이성계는 혼자 싸우게 되고
어렵사리 이겼지만 조직에서 고립되면 곤란해진다는 큰 교훈을 얻는다
공민왕 이후, 우왕 - 창왕 - 공양왕 등이 있었지만
공민왕을 끝으로 고려는 이미 몰락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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